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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있음

현이가 생긴 뒤로 한동안 현이 핑계로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났다. 핑계긴 하지만, 실제로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좀 별나고, 그런 성격이겠거니 하고 살았다. 그 성격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가 생겨서 글로 남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다. 분위기는 화기애애 했고, 안정적이었다. 사람들은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맛있는 음식을 즐겼다. 우아한 시간이었다. 나도 부드러운 미소와 차분한 행복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마음 한구석에 다른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오늘 기분이 별로였나보다’ 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가만히 잘 생각해봤다.
부러움이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삶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러움은 좀 치사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전체 삶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의 삶 중에서 좋은 것들만을 골라서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우아한 취미를, 누군가의 아늑한 집을, 누군가의 일에 대한 열정을, 누군가의 쉼을. 건빵 봉지 속에서 별사탕만 골라내듯이, 타인의 삶에서 부러워할 부분만 쏙쏙 골라내서 부러워했다.
어렸을 때 상상한 ‘이 나이 쯤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뭔가 더 나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제대로 상상하고, 기록해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그런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다. 믿을 것이 나 밖에 없다고 믿고 살아왔다는 사실과,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현재의 내 모습과 상상속에서 기대한 내 모습의 괴리가, 부러움과 합쳐지면. 열등감을 낳는다.
다행히 열등감이 나를 휘감지는 않았다. 지금도 나는 지인들과의 시간을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이라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냥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생각해봤고, 그걸 기록해본다. 그게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이 나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의 존재를 알면, 대응을 할 수 있고, 노력할 수 있다. 누군가의 부러운 면을 모두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런 노력이 보답을 할까? 삶은 별사탕 모으기 같은 ‘최고의 것들 모으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부러워할 것들은 넘치고 넘치겠지.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이 맞다면, 그 노력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으로 향해야 한다. 물론, 상황을 더 낫게 만드는 노력도 해야겠지만. ‘A도 있고, B도 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사랑받는 존재만이 단단해질 수 있고, 매력적일 수 있고, 나아갈 수 있고,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어쩌면 내가 부럽다고 했던 것들은, 삶의 일면이 아니라 그 삶의 일면에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들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이렇게 길게 나를 사랑하자는 얘기를 적을 줄이야. 아내와 현이 덕이다.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것과, 누군가의 아빠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성장할 두번째 기회이다. 첫번째 기회인 어린 시절의 ‘성장기’에는 아쉬운 것들이 많았다. 그 아쉬움 때문에 두번째 기회를 놓치지 말자. 내가 아내와 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을 우선 나에게 주어야 한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