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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서의 기술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했다. 소프트웨어와 스타트업이 만드는 변화에 반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하는 일을 바꿨다. 그렇게 일한 지 조금 있으면 9년이다. 그 동안 많이 배우고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든다. 10년이 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배운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정리해 보고싶다. 꺼내야 정리가 되고,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으니까. 물론 10이라는 숫자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 이후에도 계속 해야하는 일이다. 이 글은 기술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석사를 (겨우) 마치면서 자연스럽게 박사과정을 포기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연구 자체에 그렇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석사 과정 중에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이뤄진 성과에 나의 아이디어를 더해서 어떤 형태로든 진전을 만드는 것이 연구이다. 주어진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연구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결과를 만들어내기가 정말 어렵다. 나는 그 애정, 열정이 안 생기더라. 그 이유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첫직장을 그만 둔 이유는 많았다. 내 미래가 사원-선임-책임-수석-임원으로 이어지는 좁은 선 위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 싫었고, 소프트웨어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은 그저 멋있어만 보였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다시 돌아보니,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내가 하던 일은, 노후로 쓰기가 어려워진 장비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관련된 칩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두 경우 모두 나를 지치게 했던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도가 너무 작다'는 사실이었다. 칩의 효율을 10% 올리는 일이나, 노후한 기계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일에는 전력을 다하기가 어려웠다.
기술을 좋아한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발전의 과정이 과학적이라고 할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기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요즈음의 세상을 가장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술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많이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바로 기술,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술의 적용을 통한 프로세스의 변화이다. 그래서 나는 기술 발전 자체나, 기술 발전에 대한 기여보다는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에 흥미가 있다.
어떤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지는 다음 언젠가